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이하 ‘DT’) 사업을 하는 전통기업들은 디지털 기업의 일하는 방식이나 문화, 기술 등을 벤치마킹하며 연구한다. 이렇게 해서 도출된 주요 요소들을 DT 사업의 성공 공식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디지털의 젊고, 빠르고, 고객 중심적인 업무 문화가 전통기업에게 유입이 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아쉽게도 모든 것이 올바르게 해석되고 적용되지는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애자일(Agile)’ 이다.
CA 테크놀로지스 조사 결과, 한국 기업의 69%가 애자일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이하 ‘DT’) 성공의 결정적 요인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태평양 전체 기업의 82%가 동일한 응답을 했으니 국내 기업만의 현상은 아닌 듯 하다. 상의하달식(top-down) 의사 결정, 관료적인 행정 처리, ‘차세대’라고 불리는 빅뱅 방식의 SI 개발에 익숙한 기업에서 애자일 문화는 충격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심에 약간의 환상과 오해들이 더해지더니 최근에는 애자일 트랜스포메이션(Agile Transformation, 이하 ‘AT')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귤이 탱자가 된다는 뜻의 '귤화위지(橘化爲枳)’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개념은 문제가 없다. 주위 환경에 따라 근본 철학과 장점이 사라지고 오용과 남용이 되면서 본질이 사라지는게 문제일 뿐이다. 이야기에 앞서 전통기업들이 애자일에 열광하게 된 과정을 유추해보자. 디지털 사업에 대한 경험과 기술이 없는 전통기업들은 DT를 하기 위해 외부 자원을 활용해 DT 전략 컨설팅을 시작한다. 디지털 기업들을 벤치마킹하면서 자연스럽게 애자일이 핵심 주제 중에 하나가 되고 AT까지 이야기가 발전한다.
AT에서는 보통 조직구조, 권한, 예산 프로세스, 성과 측정, 개발 프로세스 등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데, 각 기업의 상황에 맞추어 약간의 각색을 거쳐 전략 보고서가 작성된다. 최종의사결정권자 입장에서 보면 신선하면서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디지털에 친화적으로 업무 문화를 개선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승인된 보고서는 다시 한번 상의하달식(Top-down)으로 조직에 전달되는데, 이때부터 귤은 탱자로 변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느꼈던 몇가지 문제점들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첫번째는 애자일이 적용되는 범위와 대상이 디지털기업과 전혀 다르다. 디지털 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분이라면 애자일을 스프린트나 스크럼, 칸반 등과 같은 개발방법론이나 도구 등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애자일을 적용하는 일마저 ‘컨설팅’이라는 이름을 빌어 외부에 의존하는게 당연한 기업문화에서 소프트웨어 개발방법론을 적용할 내부 개발자가 있을리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컨설팅 기업들도 AT라는 것을 만들어내어 조직구조와 권한 등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용도 모두 대동소이하여 스포티파이(Spotify)의 조직구조를 벤치마킹한다. 덕분에 상당수의 전통기업들이 트라이브, 스쿼드, 챕터 등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여 조직개편을 하는 것으로 AT를 완료했다고 착각한다. 1~2년전부터 스포티파이 조직구조에 대한 이야기와 ‘애자일 조직’으로 DT를 했다는 언론기사가 많이 등장한 실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호칭과 책임만 바뀌었을 뿐 일하는 프로세스와 역할이 바뀌지 않으니 결국은 기존의 본부, 부문, 팀 등과 다를게 없다.
두번째로는 ‘애자일’이라는 단어의 남발과 오용이다. 전통기업에서는 ‘애자일’이라는 명사보다는 ‘애자일하게’라는 형용사를 주로 사용한다. ‘애자일하게 개발하자’, ‘애자일하게 조직 구성을 하자’, ‘애자일하게 미팅을 하자’ 등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형용사는 리더들이 조직에게 업무를 지시할 때, 현업들이 외주개발사에게 업무를 요청할 때, 매우 심각하게 잘못 사용되어 진다. ‘빠르다’를 강조하면서 짧은 시간안에 많은 업무를 지시하거나, ‘유연하게’를 강조하면서 기획서나 개발 요건을 추가하면서 ‘애자일하게’가 남발되는게 현실이다. '사람 중심’과 '상향식 의사결정(Bottom-Up)’을 강조하는 애자일이 ‘갑질'을 할 수 있는 최첨단 무기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하다.
세번째로는 최종 의사결정권자의 애자일에 대한 의지가 상의하달식(Top-down)으로 전달되면서 절대선으로 포장되어 버리는 문제가 있다. ‘애자일하게 바꿔라’라는 지시가 내려지면서 기존의 조직 구성, 배포 프로세스, 개발 방법론은 모두 부정된다. 안정적이었던 조직을 개편하고, 잘 진행되고 있던 프로젝트가 워터폴 방식이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기도 하다. 애자일은 만능키도 아니며, 모든 프로젝트에 적용이 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뚜렷한 목표나 기간이 있고, 외주의 의존도가 높으며, 고객 접점이 크지 않은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워터폴이 좀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전통기업들이 애자일을 도입하면서 생기는 문제점과 오용되는 부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애자일의 근본 정신과 다양한 개발 도구들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와 업무 프로세스를 만들어내고 이를 DT의 핵심 엔진으로 가져가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시도이다. 이런 시도가 좋은 결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몇가지 변화와 명확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가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애자일은 고객을 최우선으로 하고, 고객의 요구를 빠르게 수용하고, 이를 민첩하게 비즈니스에 적용할 수 있는 개발자 중심의 변화이어야 한다. 최근 등장한 몇몇 스타트업들이 애자일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하지만, 상당수의 디지털 기업들은 자신이 일하는 방식을 굳이 애자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기업에서 ‘애자일하게’가 제대로 동작하는 이유는 기술력이 높은 개발자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DT나 AT를 하는 기업들을 만나다보면 ‘애자일을 배우겠다’며 몇십억원을 들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애자일은 배우는게 아니고 개발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 예산으로 개발자를 충원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게 훨씬 효율적이다.
둘째, 좋은 개발자를 찾는 것이 쉽지도 않거니와, 디지털 전문가들은 상의하달식 조직문화가 대부분인 전통기업으로의 이직을 선호하지도 않는다. 채용과 조직문화를 바꾼다는 것이 단기간이 되는 일이 아닐테니, 당분간은 외주 파트너사와 함께 할 수 밖에 없다. 이들과 정말 ‘애자일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MM중심의 SI 계약과 검증 방식, 감사 항목들이 바뀌어야 한다. 정해진 예산과 기간, 그리고 요건정의가 먼저 고정되어 버리는 상황에서는 애자일 프로젝트 자체가 실행되기 불가능해진다.
이런 행정적인 절차가 바뀌지 않으니 애자일이 갑질을 할 수 있는 무기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컨설팅에서 주로 사용하는 T&M (Time and Material) 방식을 적용하거나 전체 예산을 잡고 투입 시간과 결과물에 따라 유연하게 비용을 집행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트라이 포트 스튜디오(TriFort Studio)’와 같이 애자일 형태의 전문 SI 기업들도 생겨나고 있으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를 바란다.
셋째, 디지털 기업을 닮아가려면 전체 개발 공정이 바뀌어야 한다. 고객 중심의 문제 발굴과 서비스 로드맵을 구축하는 ‘디자인씽킹(Design Thinking)’, 서비스 기능 자체에 집중하는 빠른 사용자 경험(UX) 구축과 사용자 검증을 하는 '린(Lean) UX’, 그리고 애자일기반의 개발과 배포를 하고, 고객 행동 기반의 마케팅 전략을 구축하는 ‘그로스 해킹(Growth Hacking)’, 비즈니스 전략 및 로드맵을 재정비하는 ‘피버팅(Pivoting)’과 '스케일 업(Scale Up)’등이 함께 해야 의미가 있다. 이왕 벤치마킹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단면이나 일부 요소만 도입한다고 DT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직된 조직 문화와 자체 개발력이 강하지 않는 전통기업에서 DT를 수행하기 위해서 애자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해는 간다. 하지만, 컨설턴트가 아닌 현업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디지털 기업에서 더 이상 애자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대부분은 애초부터 애자일 도입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조직문화를 기초해서 일부 방법론과 도구를 사용했을 뿐이다. 애초부터 애자일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고객의 요구에 유연하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